오오히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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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오히메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호조 마사코의 딸로, 1178년에 태어났다.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타카와 약혼했으나, 요리토모가 요시타카를 살해하면서 비극적인 이별을 겪었다. 이후 입내(入內)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197년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오히메는 소설, 드라마, 만화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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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히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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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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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가마쿠라 시대) |
출생 | 지쇼 2년 (1178년) |
사망 | 겐큐 8년 7월 14일 (1197년 8월 28일) |
별명 | 이치하타/이치만 (一幡)? |
씨족 | 세이와 겐지 타메요시류 (카와치 겐지) |
부모 |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어머니: 호죠 마사코 |
형제 | 센츠루마루?, 오오히메, 요리이에, 죠교, 산만, 사네토모 |
배우자 | 요시타카 |
2. 생애
지쇼 2년(1178년), 요리토모와 마사코의 장녀로 태어났다. 요리토모가 이즈에 유배되어 있던 시절,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사코가 요리토모에게 달려가 맺어진 인연으로 태어난 첫 아이였다.[1] 지쇼 4년(1180년) 8월, 오오히메가 세는 나이로 3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요리토모가 거병하여 아즈마국을 제압하고 가마쿠라도노라 불리게 되었다.[1]
이후 오오히메는 미나모토노 요시타카와의 약혼과 이별, 입내 시도와 실패를 겪고, 겐큐 8년 7월 14일(1197년 8월 28일)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
2. 1. 요시타카와의 약혼과 이별
쥬에이 2년 (1183년) 봄, 요리토모와 대립하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장남 미나모토노 요시타카를 인질로 가마쿠라에 보내 요리토모와 화친했다. 이때 11살이었던 요시타카와 6살이었던 오오히메의 혼약이 맺어졌다. 둘은 사촌지간이기도 했다.[1]1184년 정월,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요시나카는 요리토모가 보낸 군에 의해 수도 외곽에서 패하고 죽었다.[1]
같은 해 4월 21일(6월 1일), 요리토모는 미래의 화근을 끊기 위해 요시타카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 소식을 엿들은 시녀들로부터 전해 들은 오오히메는 새벽에 요시타카를 궁녀 차림으로 변장시키고 시녀들과 함께 저택에서 탈출시켰다. 발굽에 솜을 두른 말을 준비하여 가마쿠라에서 탈출시켰다.[1] 요시타카 대신 그의 측근이었던 운노 유키우지가 요시타카의 침상에서 상투만 내놓고 쌍륙을 치는 등 시간을 벌었지만, 밤이 되어서야 요시타카가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
요리토모는 격노하여 유키우지를 체포하고, 호리 치카이에 등에게 요시타카를 추격하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오히메는 이 소식에 넋을 잃고 쓰러졌다.[1] 4월 26일(6월 6일), 치카이에의 낭당인 토나이 미츠즈미가 가마쿠라로 돌아와 이루마가와하라에서 요시타카를 죽였다고 보고했다.[1]
이 소식은 은밀하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오오히메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오오히메는 큰 슬픔에 빠져 물조차 마시지 못할 정도였다.[1] 6월 27일(8월 5일), 마사코는 오오히메가 병상에 누워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것이 요시타카를 죽였기 때문이라며 분노했고, 요리토모에게 요시타카를 죽인 무사의 배려가 부족했음을 강하게 항의했다. 결국 요시타카를 죽인 토나이 미츠즈미는 효수되었다.[1]
7살이었던 오오히메는 이 일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이후 십여 년 동안 요시타카를 잊지 못하고 병상에 눕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요시타카를 위한 추선공양, 독경, 사찰 기도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오오히메의 마음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1]
하지만, 이러한 일화를 기록한 「아처경(吾妻鏡)」의 기술은 문식이 가해진 것으로 여겨져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판별하기 어렵다.[1]
2. 2. 입내(入内) 시도와 실패
겐랴쿠 원년(1184년) 8월,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리토모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요리토모의 딸을 섭정 고노에 모토미치에게 시집보낼 의향을 보였다.[2] 그러나 가네자네를 섭정으로 추천하려던 요리토모는 이를 거절했다.[3]겐큐 2년(1191년), 요리토모가 딸을 고토바 천황에게 입내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가네자네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이듬해인 겐큐 3년(1192년) 고시라카와 법황이 사망하고, 가네자네가 정권을 획득하면서 이 일은 중단되었다.
겐큐 5년(1194년) 8월, 마사코는 병세가 호전된 17세의 오오히메에게 이치죠 타카요시와의 혼담을 권했지만, 오오히메는 "그런 일을 할 바에야 연못에 몸을 던지겠다"며 거절했다.[4]
겐큐 6년(1195년) 2월, 요리토모는 도다이지 낙경공양을 명목으로 마사코와 오오히메 등을 데리고 교토로 상경하여 오오히메의 입내 공작을 펼쳤다. 요리토모는 궁중 실력자인 미치치카와 단고노츠보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3월 29일(5월 10일)에는 단고노츠보네를 초청하여 마사코와 오오히메를 대면시키고, 은제 마키에 상자에 사금 3백 냥, 흰 능직물 30필 등 많은 선물을 보냈다.
이전과 달리 요리토모는 가네자네와는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인 이야기는 피하고, 단고노츠보네와의 결정을 번복하는 등 가네자네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가네자네는 실각한다(겐큐 7년의 정변).
요리토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오히메는 병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겐큐 8년 7월 14일(1197년 8월 28일)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오히메 입내 운동은 요리토모가 미치치카와 단고노츠보네에게 이용당해 조정 내 반(反) 막부 세력의 대두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요리토모는 이후 차녀 산만의 입내를 추진했으나, 자신과 산만의 잇따른 죽음으로 좌절되었다. 이는 냉철한 정치가였던 요리토모의 가장 큰 실수로 꼽히며, 딸을 천황의 후궁으로 들여 외척이 되고자 했던 중앙 귀족 후예로서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 한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미치치카는 요리토모에게 최대한 배려했으며, 요리토모에게 조정 통제는 필수적이었고, 입내 좌절은 예상 밖의 사태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5][6]
2. 3. 오오히메 사후
오오히메의 죽음은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적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요리토모는 오오히메가 궁중에 들어가는 데 실패한 이후, 차녀인 산만을 궁중에 보내려 했으나, 산만과 요리토모 자신이 잇따라 죽으면서 이마저도 실패했다. 오오히메의 무덤과 그녀를 기리는 지장당이 가마쿠라에 남아있다.3. 평가 및 분석
오오히메의 입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적 야망과 당시 중앙 귀족 사회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오오히메의 비극적인 일생은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된 한 개인의 고통을 보여준다.[1]
4. 관련 작품
- 쿠라모토 유후의 소설 '유메노스가타미 - 요시타카와 오오히메의 이야기' (1991년)
- 쿠라모토 유후의 소설 '가마쿠라 성쇠기 1 바다에 잠들다 - 요시타카와 오오히메' (1992년)
- 호조 마사코 (1970년, NET) - 배우: 타케나카 쿠니에 → 사카키바라 루미
4. 1. TV 드라마
- 풀이 불탄다 (1979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니시오 마리 → 사이토 코즈에 → 이케가미 키미코
- 요시츠네 (2005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노구치 마오
- 가마쿠라도노의 13인 (2022년, NHK 대하드라마) - 연기:난바 아리사 → 오치이 미유코 → 미나미 사라
4. 2. 만화
- 마스라오 비본의경기 오오히메애상가 (키타자키 타쿠, 2014년) - 전 1권. 마스라오 비본의경기의 본래 주인공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이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 겸 화자를 오오히메로 하는 외전 작품이다.[1]
- 시간을 넘은 소녀들 「1183년의 신랑 - 가마쿠라에 핀 순애 -」 (카야마 유미, 1995년, 단편)[1]
- 그날 본 벚꽃 (후지노 모야무, 2000년, 단편)[1]
- 한 송이 꽃 (후지노 모야무, 2007년, 단편)[1]
4. 3. 소설
- 나가이 사야코의 여인 입안 (2022년)
- 쿠라모토 유후의 약속 - 오오히메・꿈 이야기 (1996년)
5. 사진
참조
[1]
서적
院政期東国と流人・源頼朝の位置
校倉書房
[2]
문서
玉葉
년8월23일
[3]
서적
義経・頼朝問題と国土高権
校倉書房
[4]
문서
吾妻鏡
건구5년8월18일
[5]
서적
源頼朝 すでに朝の大将軍たるなり
ミネルヴァ書房
[6]
서적
源頼朝 武家政治の創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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